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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역사 (16 - 19세기)

반종교개혁에서 나폴레옹까지 (1559년 - 1814년)

1559년 Cateau-Cambrésis 조약 이후 이탈리아는 외국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탈리아 북부는 신성로마제국 -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간접통치 아래에 있었고, 남부는 스페인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1700년대 유럽의 여러 차례 왕권 승계 전쟁 이후, 남쪽은 스페인 부르봉 왕가쪽으로 왕권이 넘어가고 이탈리아 북부는 합스부르크-로렌 가문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나폴레옹 시대에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침략을 받았는데, 이로 인해 여러 공화국으로 또 나눠지게 됩니다. (이탈리아 나폴레옹 왕국 - 프랑스 제국) 

비엔나 회의(1814)는 18세기 후반의 상황을 복원했지만 초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으로 인해 빠르게 전복되었습니다.

 

이탈리아 경제는 1600년대 1700년대에 이탈리아가 대서양 노예 무역 다툼에서 제외되면서 쇠퇴했습니다. 1600년대 북부 및 중부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발전된 산업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지역은 그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1870년까지 이탈리아는 경제거으로 후진적이고 침체된 지역들이 많았으며, 농업 중심 산업 구조로 인구도 가지고 있던 자원에 비해 너무 많았습니다. 잦은 전쟁, 정치적 갈등, 제한된 재정 운영 능력, 그리고 서유럽의 아메리카 침략, 무역 분쟁에서 이탈리아가 제외되면서 경제적 여파가 더 컸습니다.

 

17세기 이탈리아 역사

17세기는 이탈리아 역사의 격동의 시기였고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컸습니다. 여기에 개신교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의 반발인 반종교개혁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권력이 강화되었습니다. 

천문학, 물리학 분야에서 갈릴레오의 발견과 건축, 회화에서 바로크 양식이 탄생하는 등 중요한 과학, 예술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는 경제적 쇠퇴를 경험했습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아메리고 베스푸치, 조반니 다 베라자노 등 이탈리아에서 위대한 탐험가들이 나왔지만, 신대륙의 발견이 유럽의 무게 중심을 이탈리아에서 서유럽으로 이동시켜 상업 중심지였던 베니스를 포함 다른 이탈리아 항구 도시의 중요성이 매우 약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이 30년 전쟁 (1618-1648)에 개입되면서 부분적으로 이탈리아 소유에 대해 세금을 걷어 이탈리아 상업, 농업을 더 고갈시켰습니다.  

 

그리고 중세시대에 발병했던 흑사병이 다시 창궐하여 이 기간 내내 이탈리아를 괴롭혔습니다. 이탈리아 북부, 특히 밀라노와 베니스를 황폐화, 1630년 인구의 약 25%인 백만명이 죽어나갔습니다. 1656년 흑사병은 나폴리 왕국의 인구 43%를 죽였습니다. 추후 역사가들은 이탈리아 도시 인구의 극적인 감소가 주요 상업, 경제적 몰락에 큰 기여를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한 추산에 따르면 1500년 이탈리아 GDP는 프랑스 GDP 의 106%였으나 1700년에는 75%에 불과했습니다.

 

18세기 이탈리아 역사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1701-1714년)은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가인 카를로스 2세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인 필립 공작에게 스페인 유산 전체를 물려주지 않고 사망하면서 발발하였습니다. 한편 당시 프랑스 패권의 위협을 맞아, 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공화국 및 기타 약소국 등의 대동맹이 헤이그에서 체결되었습니다. 동맹은 성공적으로 프랑코와 스페인 "두 왕관의 파티"와 싸워 승리했고, 이후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의 체결로 이탈리아 대부분 (밀라노, 나폴리, 사르데냐)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로 양도되고,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에 양도됩니다. 

하지만 스페인은 4자 동맹 전쟁 (1718-1720)으로 다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고 프랑스 왕좌까지 차지하려 시도했으나 패배합니다. 헤이그 조약의 결과로 스페인은 이탈리아의 주장을 포기하는데 동의했고 사보이아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2세 공작은 시칠리아를 오스트리아와 교환하여 사르데냐 섬을 얻기로 합의합니다. 스페인은 추후 1738년 비톤토 전투 이후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되찾습니다.

 

나폴레옹의 시대

18세기 말 이탈리아는 16세기와 거의 비슷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차이점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가 예전 스페인 자리를 대체했다는 점. 그리고 Savoy 공작은 현재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산악 지역 (북서부지역)을 포함하여 이탈리아 영토를 늘려 Sardinia 의 왕이 됩니다.

 

이 상황은 1796년 나폴레옹 아래의 프랑스 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흔들립니다. 그들은 1차 연합군이 사르데냐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는 목적으로 침공하게 됩니다. 첫 번째 전투는 4월 9일 프랑스와 피에몬테 사이에서 발생하고 2주만에 사르데냐의 빅토르 아마데우스 3세는 휴전 협정에 서명하게 됩니다. 5월 15일 프랑스 장군은 밀라노에 입성하게 됩니다. 이 후 오스트리아의 반격을 물리치고 전진을 계속한 그들은 1797년 베네토에 도착합니다. 이곳에서 프랑스의 압제에 대한 반역 행위인 베로나 부활절이 일어나 나폴레옹을 약 1주일 간 묶어둡니다.

 

나폴레옹은 1797 - 1799년 프랑스 혁명의 이름으로 이탈리아 대부분을 정복합니다. 그는 오래된 부대를 통합하고 오스트리아의 소유지를 분할합니다. 새로운 법전과 오래된 봉건적 특권의 폐지로 완성된 일련의 새로운 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치살피나 공화국은 밀라노를 중심으로 하였습니다. 제노아 도시는 공화국이 되었고, 배후지는 리구리아 공화국이 되었습니다. 

로마 공화국은 교황이 프랑스로 파견되는 동안 교황 소유지에서 형성됩니다. 나폴리 공화국이 나폴리 주변에 형성되었으나 연합군의 적군이 이곳을 탈환하기까지 불과 5개월 동안만 지속됩니다. 토한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바타비아 공화국, 스위스를 헬베틱 공화국으로 바꿉니다. 

이 모든 새 국가들은 프랑스의 위성국이었으며 파리에 막대한 보조금을 지불하고 나폴레옹 전쟁에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야 했습니다. 

한편, 전체적으로 정치 및 행정 시스템이 현대화되고 무역 장벽이 감소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게토가 폐지됩니다.  

 

1805년 프랑스가 제3차 연합과 프레스부르크 조약에 승리한 후, 나폴레옹은 베네토와 달마티아를 되찾아 이탈리아 공화국에 병합하고 이탈리아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해에 두 번째 위성 국가인 리구리아 공화국(구 제노아 공화국의 후계자)이 프랑스와 합병하라는 압력을 받아, 1806년에 그는 나폴리 왕국을 정복하였고, 1808년에는 Joachim Murat에게, 그의 누이 Elisa와 Paolina는 Massa-Carrara와 Guastalla의 왕자들과 결혼하도록 하였습니다. 1808년에는 마르케와 토스카나를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하기도 했습니다.
1809년 보나파르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 대조를 이루고 자신의 국가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로마를 점령했으며 교황을 처음에는 사보나로, 그 다음에는 프랑스로 추방했습니다.

러시아 이후,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다시 재결합하며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패배시켰고, 그 후 그의 이탈리아 동맹국들은 무라트를 포함하여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도록 하였습니다. 1814년 4월 6일 파리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왕위를 포기하고 엘바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결과인 비엔나 의회(1814)는 상황을 1795년 상황에 가깝게 복원하여 이탈리아를 오스트리아(북동쪽과 롬바르디아), 사르데냐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남쪽과 시칠리아)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옛 공화국은 재창조되지 않았고,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로, 제노아는 사르데냐 왕국으로 소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