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대 (Ancient Rome and Roman Kingdom)
사실 로마 왕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하지 않습니다. 당시 작성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고 로마 공화국, 로마 제국 시대에 쓰여진 역사도 주로 전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 왕국의 역사는 기원전 753년 중부 이탈리아의 티베르 강을 따라 팔라티노 언덕 주변에 정착지가 있는 도시 건국을 시작으로 합니다. 팔라티노 언덕과 주변 언덕들은 로마 중심부를 방어할 수 있는 방어목 역할을 하였고 이는 침략자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습니다.
대대로 내려져오는 로마의 역사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은 로마의 첫 세기에 무려 일곱명의 왕이 로마를 통치했고 각 정권별 약 35년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갈리아인들이 기원전 390년에 알리아 전투 이후 도시 약탈 시 로마 역사 기록을 대부분 파괴했으며 남은 것은 시간이 지나 도난당하고 사라졌습니다.
로마 공화국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509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집니다. 당시 판사와 다양한 의회가 설립되었습니다. 헌법도 존재하였는데, 이 법은 견제와 균형, 권력 분립을 규정했습니다. 가장 중요했던 판사는 두명의 집정관이었는데 이들은 함께 행정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집정관은 원로원과 함께 일했는데 처음 원로원은 고위 귀족이거나 귀족들의 자문위원회였으나 점차 시간이 지나며 이들의 규모가 커지고 권한이 강해졌습니다.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4세기 초기 주변 국과의 분쟁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한 편 갈리아인들에게 공격을 받기도 하였으나 결국 이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이를 계기로 로마인들은 점차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민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합니다.
기원전 3세기에 로마는 강력한 페니키아 도시국가인 카르타고라와 맞서게 됩니다. 총 세번의 포에니 전쟁에서 결국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히스파니아, 시칠리아, 북아프리카를 정복하게 됩니다. 기원전 2세기에는 마케도니아와 셀레우코스 제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 헬레니즘 왕국들의 정복을 통해 로마와 그리스 문화가 융합되고 로마는 더 강력해지고 그 영향력도 더 세지게 됩니다. 군사적으로 이들과 견줄 주변국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스페인 (Hispania) 과는 그 과정이 힘들었습니다. 로마군은 기원전 2세기 초에 스페인을 점령했지만 그 때부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거센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누만시아의 켈티베리아 요새는 기원전 140년대와 130년대에 로마에 대한 스페인 저항의 중심지가 되었고 누만시아는 기원전 133년에 함락,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기원전 105년에 켈티베리아인들은 갈리아 남부에서 로마군을 공격, 약 8만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스페인 (Hispania) 정복은 기원전 19년에 완료되었으나 이는 로마에 막대한 비용과 인적 손실을 입혔습니다.
기원전 2세기 말 유럽에서는 게르만 부족의 대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부족들은 힘이 강력하여 로마에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었고 결국 Aquae Sextiae, Vercellae 두 전투에서 게르만 부족의 전멸로 위협이 끝이 나게 됩니다. 이 두 전투에서 약 29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로마 공화국은 사회적 불안 그리고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에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가 등장합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강력한 인물들이자 라이벌이었던 Marcus Licinius Crassus와 폼페이우스 (Pompey)를 중재하고 화해시키며 갈리아에서 집정관직과 군사령관을 맡게 되어 더 중요한 인물이 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삼두정치라는 정치체제의 발전으로 이르게 됩니다. (3명의 주요 인물이 로마를 다스림)
하지만 기원전 53년 Crassus의 죽음으로 삼두정치가 해체,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Pompey가 권력을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Gallic War에서 승리한 Pompey가 카이사르를 제거하려했으나, 카이사르는 기원전 39년에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를 침공, 순식간에 Pompey를 물리치고, 결국 로마를 다스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기원전 44년 해방군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는 로마에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후에는 카이사르의 동료이자 친구였던 마크 안토니우스에 의해 로마가 통치됩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양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장군과 카이사르의 친한 친구였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수립하여 로마를 통치해나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추후 레피두스는 이들을 배신, 기원전 36년에 은퇴하게 됩니다. 반면 안토니우스는 연인이었던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집트에 정착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사치스럽고 헬레니즘적인 라이프스타일을 선택하여 로마 정치인에 반한다는 이유로 반역자로 간주됩니다.
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알렉산드리아를 기증하고 클레오파트라를 "왕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주게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녀에게도 새로 정복한 동부 영토와 칭호를 주면서 옥타비아누스와 갈등이 일어나게되고 이는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이집트군을 전멸시킵니다. 이로 인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옥타비아누스가 로마 공화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됩니다.
악티움 해전 이후 로마는 북해안, 대서양, 지중해, 홍해, 흑해를 아울러 해상 패권을 가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됩니다.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전 옥아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됩니다. 그는 40년동안 통치하며 로마 문명을 정점으로 끌어올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을 아우구스투스 (Augustus)로 바꾸어 사용합니다. 이를 기점으로 로마 제국이 시작되었다 간주합니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공화제 정부였으나 아우구스투스는 왕과 같이 절대적인 권력을 가졌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모든 총독 (군 통제) 권한을 부여한 적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군대가 있던 국경의 까다로운 지방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치하에 있었고 이 지역들은 제국 산하로 분류되었습니다. 반면 평화로운 상원 지방은 상원의 통제하에 있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 속주가 세워지고 로마는 Domina Provinciarum (지방의 지배자)라는 특별한 지위를 갖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아래 로마 문학은 라틴 문학의 황금기를 갖게되고 꾸준히 성장하게 됩니다. Vergil, Horace, Ovid, Rufus와 같은 당대의 시인들이 문학을 더 풍부하게 발전시키게 됩니다. 또 아우구수투스는 카이사르가 추진했던 달력의 변화를 꾀했으며 8월 (August)은 그의 이름을 따 불려지게 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계몽 통치는 Pax Romana 로 알려진 로마 제국의 200년동안 평화를 이끌고 번영하는는 시대를 가져옵니다.
이미 거대해진 제국은 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크게 노력하진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 이후 정권을 이어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시작한 영국 정복과 트라야누스 황제가 시작한 다키아 정복은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1-2세기에 로마 군단은 북쪽 게르만 부족과 동쪽 파르티아 제국과의 전쟁에도 동원되게 됩니다. 또한 1세기 후반 - 2세기 전반 약 70년간 이뤄진 유대인-로마 전쟁은 수많은 사상자들을 발생하게 됩니다.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죽은 후 로마 제국은 결국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서부 지역은 증가하는 경제적, 정치적 위기와 빈번한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인해 수도를 Mediolanum에서 Ravenna로 옮기게 됩니다.
476년 서부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오도아케르에 의해 폐위됩니다. 몇 년 동안 오도아케르의 통치 아래 연합을 유지하게 되나, 오스트로고트족에 의해 전복되고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해서도 전복됩니다. 이로 인해 서로마는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반면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던 동로마 제국은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다시 획득하는데 성공하여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합니다. 610년대로 접어들면서 로마에서 고대의 라틴적은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됩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 내에서 그리스 문화를 보급하는데 힘쓰고 이래 인해 라틴 문화는 위축됩니다. 그리고 추후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 칭하게 되는 요인으로 자리잡게 되나 주변국들은 이 명칭 대신 동로마 제국을 고대로부터 이어진 로마 그 자체로 여기고 있었습니다.